유럽 고전주의 미술의 3대 작가
고전주의 미술
고전주의는 1760년경 시작되어 1780, 1790년대에 그 절정에 달하고, 1850년경까지 계속되었다.

고전주의는 말 그대로 고전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시대적으로 폼페이나 헤라클레늄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그리스 로마 미술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동경하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때마침 독일의 고고학자 빈켈만의 <고대미술사 1764년>도 출판되었다.

고전주의 미술은 바로 이런 고대인들의 삶을 재현하려 했다. 표현적인 면에서도 고대 미술의 엄격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데 고전주의 미술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을 연구하고 회화 속에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즉 균형과 비례, 그리고 실감나게 그리기 위한 노력들이 화폭을 채우고 있으며, 이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화폭으로 옮겨 놓으며 미술의 변화를 통해 시대 흐름까지도 읽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하지만 19세기 전반으로 접어들면서 고전주의의 이성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반발하는 미술이 나타나게되고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의 새로운 유파들이 생겨난다.

물론 이들 미술사조는 결국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등의 분위기를 틈타 당대의 미술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엄격하고 장엄한 양식으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그려내려 했던 고전주의 미술양식으로 시작한 19세기 미술은 이후 다양한 변화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켰다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 1748-1825)
다비드는 프랑스의 고전주의의 창시자 및 지도자로서 널리 알려지고 있다. 파리에서 태어나 죠셉 비앙의 제자였으며, 1755년 로마에 유학하여 라파엘로 및 고대미술을 연구한 후 1780년 귀국하였다.

1785년에는 대혁명적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고전주의의 이상을 형식적과 내용면에서, 순수하게 실현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다비드는 자코뱅당원으로서 프랑스 혁명운동에 적극참여하고 마라의 죽음 등 혁명사건을 취재한 작품도 그렸다.

혁명이 끝난 후 나폴레옹의 궁정화가로 나폴레옹 대관식을 비롯한 영웅을 찬미한 작품을 남겼으나,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왕조가 부활하자 앞서의 혁명때 국왕의 사형에 투표한 책임을 추궁당해 추방되어 벨기에 브뤼셀로 가서 그곳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다비드는 고대의 제재와 내용을 이상으로 하여 지나치게 엄격한 구성 뚜렷한 윤곽 조각과 같은 찬 느낌의 색조 등을 추구하였으며, 앵그르에 의해 그 완성을 보았다.

사비니 여인들
1799년, 캔버스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고대로마 건국에 얽힌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초기 로마는 무인만의 남성세계로 후세대가 문제가 되었어었다. 그래서 근접 마을의 사비니족을 로마축제를 구실로 초청하여 그 여인들을 약탈했다. 여인들을 약탈당한 사비니 남자들은 그 후 실력을 길러 복수하고자 로마에 쳐들어 갔을 때 로마사람들의 처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있던 사비니여인들이 싸움에 끼어들어 싸움을 중재하고 있는 장면이다.
앵그르(Jaean Dominique Ingres : 1780-1867)
당시의 고전주의 회화 양식은 형식에 너무 지나친 나머지 인간적인 감성이 싸늘히 식어 있었다. 하지만 앵그르에게는 현실에 대한 집착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 또한 놓치지 않는 능력이 있었다
특히 여인들의 초상이나 나체를 통해 드러나는 명쾌한 형식과 우아한 자태. 이는 그만이 가질 수 있었던 독특한 표현의 영역이었다.

소묘 부분에서 앵그르는 미술의 역사상 최고의 화가로 손꼽힌다. 정확한 소묘를 바탕으로 한 앵그르의 예술에는 비례와 균형, 조화라는 고전적인 원칙들이 우아하게 담겨져 있다.

87세의 긴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예찬은 예술혼으로 끊임없이 불타올랐다.
그랑드 오달리스크
1814년, 캔버스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앵그르의 나부 중 가장 대표적인 걸작이다. 1813년 카롤리느 뮐러 여왕의 의뢰로 그렸으나 영왕에게 전해지지 않고 프로이센 왕의 시종장 풀타레스 고르제 백작이 1819년 구입하였다. 오달리스크란 터어키 궁전의 궁녀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허리가 길다는 이유로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관능적인 미를 표현하기 위한 앵그르의 수법으로 알려져있다.
앵그르가 화단에 입문하던 시기의 프랑스 회화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을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삼는 고전주의가 성행했다.

이 같은 시대적인 배경과 맞물려 앵그르는 고전주의 화풍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고, 다비드의 뒤를 잇는 고전주의의 대표 화가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부터 44세가 되던 해까지 이탈리아에서의 유학생활을 통해 그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한층 성숙하고 고조시킬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얻었다.
그로
다비드가 총애한 제자, 나폴레옹 신화의 주요한 화가, 훌륭한 초상화가이며, 특히 전쟁화에 독보적인 명성을 나타낸 그로는 파리 태생으로 아버지도 화가였고 14세 때 다비드에게서 배웠다. 부분적으로는 다비드를 능가했다.

스승 다비드가 실각하여 벨기에로 떠날 때 다비드는 가장 신뢰하는 후계자인 그로에게 제자들을 부탁하고 고전주의의 정통적인 길로 되돌아올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로는 그의 회화적 본능과 아카데믹한 원리사이에서 괴로워하다가 다비드 만큼의 명성을 얻지 못하고 자살로서 생애를 마쳤다.
아르콜 전장의 나폴레옹
1796년, 캔버스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그로가 25세 때 그린 영웅숭배의 초상화로서 27세의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의 전투에서 군대를 인솔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초상화에는 운명적인 인물로서의 나폴레옹의 신비가 다비드 조차 해낼 수 없을 만큼의 용솟음치는 기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by noul | 2005/06/04 14:10 | * Art & Music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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